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20150502>-어떤 열쇠//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3 교토의 역사



일본속의 한국을 찾는 열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3 교토의 역사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우리는 어떤 시대의 책과 생활용품을 비롯한 유물들을 발견하면서 한 시대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된다. 우리는 그 흔적들을 발견한 이후 조심히 그들을 꺼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관리하고 보존한다. 슬프게도 우리나라는 잦은 침략으로 많은 유물이 훼손, 유실되었다. 그래도 그 유물들의 존재가 다시 확인되어 복원되고 발견될 때 다시 또 몰랐던, 새로운 역사가 증언된다.


 아주 가끔, 혹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자주, 우리 곁에 항상, 당연히 존재하던 유물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다. 지난 2008년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한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500년 넘게 서울 시내 한복판을 지키며 당당히 국보1호 자리를 차지하던 숭례문은 한 순간에 시커먼 재로 변해버렸다. 숭례문 화재는 또 하나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우리는 그 때의 사건에 비추어 그동안 우리 문화와 역사, 그리고 문화유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도래인, 한국인? 일본인?


 생소한 개념, 도래인(渡來人). 도왜인이라고도 하며 바다를 건너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이라 해서 도래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그들은 한국계 일본인이다. 그들은 삼국시대부터 일본으로 이민을 가 우리의 문화와 기술을 전파하고 헤이안 시대(교토를 수도로)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우리문화를 일본에 전해준' 그 사람들이 바로 도래인이다. 본 책에서는 '이민에 성공한 우리 민족', '결코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의 후손인 일본인'등으로 정리한다. 그들은 1500년 전의 재일교포들인데, 아픈 역사를 겪은 현대의 재일교포들과 달리 일본의 역사를 주도하고 써 내려갔다. 그들은 교토에 '하타'라는 성씨로 사사(寺社, 하타씨 절)를 창건하고 교토를 수도로 하는 헤이안시대를 이끌어갔다. 일본의 역사 한편을 장식한 일본인이자 우리 민족이다.

 

 그 당시 우리 삼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통해 우호적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일본이 우리의 군신국가였다고 보는 쪽이 적절하다) 당시 일본은 우리의 백제를 섬기고 있었고 고구려와도 많은 교류를 했다. 신라와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일본의 반감을 사 통일신라 이후 교류가 줄었다.

 

 도래인들이 일본에 전파한 문화는 일본 고유의 문화로 발전해나갔다. 불교는 백제의 노리사치계가 전했지만 밀교와 같이 그들 정신에 맞는 불교로 발전했다. 우리와 달리 시내 한복판에 커다란 절이 빽빽하게 들어서 아직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며 관광객을 맞고 있다. 수백 개의 절 중 하나쯤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훤칠한 빌딩 하나정도는 들어 설 수 있지만 역사적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교토시민들은 고층 건물 설립에 반대한다. 그래서 교토시내의 고층 건물이라곤 교토타워와 교토역 건물뿐이다. 이들은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무라이가 쓰던 다케야리 (죽창)’처럼 홀로 높이 솟아 교토의 경관을 망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주나 프랑스 파리도 고층 건물의 건축을 제한하고 있지만 교토는 주민들 스스로 고층 호텔 숙박 관광객의 출입을 제한하는 사찰도 있다. 게다가 교토주민들은 문화재 보존을 위해 엄청난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지자체와 주민들 모두가 적극적으로 도시 전체를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일본과 역사'하면 어쩐지 역사왜곡부터 떠오른다. 일본은 근현대사 콤플렉스가 있어서인지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한다. 근현대사를 왜곡하기 위해 고대사까지 왜곡한다.


1970년 세워진 이 비석 (광륭사 중건비)에는 광륭사의 역사를 길게 새겨 놓았는데 그 둘째 줄 진하승이 창건했다의 바로 윗부분에 일곱 글자를 도려내고 매워 놓아 빈칸으로 남긴 흔적이 있다. (54페이지)


 ‘진하승은 신라에서 도래한 한국계이다. 그는 아스카시대 쇼토쿠태자의 정치를 도우며 교토라는 도시를 불교문화로 꽃피우는데 이바지한 인물이다. ‘진하승이 창건했다위에는 분명 진하승이라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곱 자는 지워져야만 했다. 한국에서 도래한 사람들이 일본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먼저 근대화된 일본은 한국을 침략해 주권을 빼앗고 가혹한 식민 지배를 했다. 그 때의 잔해가 위안부와 친일파, 그리고 우토로 마을 (제일교포 마을) 등의 문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 독도 문제로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역사 왜곡까지 범하며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거리는 가장 가깝지만 마음은 가장 먼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이유에서 일본은 그 일곱 자를 지울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대외적 역사인식에는 다소 민망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나가는 태도 같은 역사인식은 충분히 배울 만하다.


일본은 전통을 그 옛날의 전통으로 묵히지 않고 근현대에도 계속 생명력 있게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358페이지)


일본의 절집을 답사하다보면 이처럼 종교와 역사와 문학,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장면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일본의 이런 모습이 언제나 부럽다. (221페이지)


 우리의 도시와 문화유산들은 우리네의 삶과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들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다. 우리의 유산들과 도시는 사이에 선을 그어놓은 듯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마음도 열려있지 않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삶과 별도로 존재하는 걸까?



일본의 역사도 잘 알아야


 이 책이 발표되고 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박사는 본 책이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일본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논란이 될 것이라 예상을 했다. 하지만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하며 출간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라 하면 흔히 우리 백제에서 전부 넘어간 것 아니냐, 우리를 괴롭힌 나쁜 놈들의 역사도 인정하는 거냐는 등의 반응을 한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많은 것을 전파했고 그들이 정착한 뒤 일본인들에게는 우리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역사가 있다. 잔인한 침략의 역사든, 섬에서 발달한 아름다운 불교사든 그들 고유의 역사가 있다. 우리가 전해준 문화도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펼쳐져 새로운 문화로 꽃피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에게는 이런 사실을 알려줄 책이 필요했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딱히 배울 생각도 없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과 관련된 사실만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한국의 고대사는 일본을 언급하지 않고도 서술할 수 있지만 일본의 고대사는 한반도와 연관을 말하지 않고는 전개해나갈 수 없다라고 하듯 우리는 그동안 굳이 알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일본이 역사 왜곡을 할 때마다 무엇을 어떻게 왜곡하였는지 정확히 집어낼 수 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된 그 무엇에 분노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알아야 서명운동을 하든, 사과를 요구하든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자세가 되는 것이다.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왜곡된 역사일지라도 고대한국사의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은 갖추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면 더 많은 것이 잘못되어 버린다.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그 나라가 하필 일본이라니. 하지만 일본의 역사를 알고 나면 우리가 앞으로 일본을 대할 때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하는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시작이고 알아야 해결로 향한 발걸음을 뗄 수 있다. 우리 역사만큼 자세히 알 필요도 없다. 어떤 흐름으로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났는지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문화유산과 함께, 우리 역사와 함께 조금씩 찾아가면 된다. 역사를 아는 것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상당히 많아진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억울함도 풀어드려야 하고 독도도 지켜야 하는 우리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우리의 역사교육과 역사의식


 교과서에 실린 그림 때문에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문화유산은 당연히 더 반갑다. 그런 이유에 교과서에 실린 문화유산 주변은 항상 북적북적하다. 일본의 '조수인물회화'와 우리 경주의 '괘릉'이 대표적인 예이다. 본 책에 따르면 경주 괘릉이 교과서에서 빠지면서 관광객이 80%나 줄었다고 한다. 줄어든 80%의 관광객은 교과서에 나오는 문무대왕릉을 찾아간다고 하니 교과서의 파급력은 대단하다. 쉽게, 경주에 가면 누구나 불국사에 간다. 불국사 자체도 교과서에 실리지만 불국사에서도 '다보탑''석가탑' 주변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있다. (심지어 석가탑은 교과서뿐만 아니라 동전에서도 볼 수 있다.) 당연히 궁금하고 이왕 온 김에 그들이 보고 싶다. 그러나 그 외의 문화유산에는 관심이 가질 않는다. 경주에, 불국사에 왔는데 다보탑, 석가탑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교과서와 더불어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문화유산 주변도 북적북적하다. 그만큼 친숙함이 답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방영 이후 경주에 간 적이 있다. 곳곳에 극중의 사진이 비치되어 사람들은 극중 인물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일지라도 ? 드라마 촬영지라고? 오 신기해 사진이라도 찍자하고 관심을 갖고 몰려들었다. 문화유산만이 가진 힘이었다.

 

 뒤늦게 시작된 역사교육의 의무화. 단순히 지식적인 역사 교육을 넘어 역사 인식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한국사라는 과목이 단순한 암기로 지나선 안 된다. 한국사라는 과목을 통해 역사관을 형성하고 우리 문화의 기반을 닦는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2017년 수능부터 한국사가 필수과목이 된다. 물론 시험을 위한 공부만으로 역사의식이 생기긴 어렵다. 그래도 최소한의 지식은 의무적으로 익히게 되니 좋은 기회이다.



문화사 중심의 역사교육


 저자는 우리의 역사교육이 '정치적 사건 위주가 아닌 문화유산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교육은 정치적 사건을 중심이기에 그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일부 소개될 뿐이다. 그마저도 대부분 특별한 설명 없이 그저 참고 자료로 작게 첨부된다. 교육방식을 바꾸기 어렵다면 역사부도를 이용하여 더 많은 자료를 배포하며 흥미를 자극할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사진 자료는 시험에 내가 어려울 수 있다. 그래도 문화유산 관련 자료와 더불어 자세한 설명과 당시 상황을 배우는 것만으로 학습효과가 높아질 뿐 아니라 우리 역사에 대한 의식이 생기지 않을까.



역사로 생긴 문제, 역사로 해결하기

 

 스님은 홀로 깨치기를 좋아하고 남을 가르치기엔 마음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길을 가는데 한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우친 자가 나중에 깨칠 사람을 위하여 가르치는 데 소홀히 하면 안 된다'라고 꾸짖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363페이지)


 교토는 우리의 경주와 닮은 점이 많다. 1000년이란 세월 동안 한 나라의 수도였고 도시 전체가 역사를 안고 있다. 역사의 도시하면 떠오르는 도시이기도 하다. 교토는 고대 우리나라에서 도래한 도래인들에 의해 시작된다. 그리고 도래인들을 통해 일본에 불교가 전해졌다. 백제의 왕족은 일본에 거주하기도 했고 조선시대에는 조선 통신사를 통해 일 끊임없이 부딪힌다. 우리 조상들은 일본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며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진 것일까. 임진왜란부터였을까, 근대에 와서 그런 걸까 이렇게 가까이 살면서 계속 부딪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프랑스가 소장하고 있다. 과거 프랑스인이 프랑스로 가져갔다고 하는데 우리는 반환은커녕 계약을 하고 대여하여 전시하는 처지에 있다. 분명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위대한 유물인데 저기 낯선 땅에서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이 오래전 헤어진 친구, 직지와 다른 문화유산들도 되찾는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0156월 


(사진출처: 대표사진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