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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록/조금은 긴 이야기

<20180904> 티비를 보며 보내는 여름 휴가

 

 





     이상하게 밤에는 티비가 보고 싶다. 특별히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나오는 건 아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티비가 보고 싶다.


     내가 열 두세살 적, 우리가족은 강원도 고성으로 휴가를 갔었다. 친한 가족의 본가가 해변에 있어 매년 그곳으로 여름휴가를 가곤 했다. 늦은 저녁 맛있는 음식도 먹고 밤바다도 보고 하나 둘 잠들던 시간이었다. 그날 밤도 어쩐지 티비가 보고 싶었다. 평소에 잘 깨어있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잠도 오지 않았다. 에어컨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덥지 않았다. 커다란 창문을 모두 열어두니 약간은 써늘한 바닷바람이 들어왔다. 불쾌하지 않은 여름밤이었다. 소파에 기대어 기분이 좋았다. 그날 처음으로 김정은의 초콜릿을 보게 되었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더불어 여러 얘기를 하는데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누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초콜릿이라는 프로그램 제목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정은의 목소리도 좋았다. 늦은 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았다.


     휴가를 다녀오고, 그렇게 늦은 시간에 깨어있던 적이 없어 오랫동안 초콜릿을 볼 수 없었다. 그러고 고등학생이 되어 한 달에 한번 집에 오면 늦은 시간까지 꼭 티비를 봤다. 한 달에 하루 티비를 보기 때문에 항상 거실에 누워 있는 그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보게 되었다. 토요일 밤에 보고 싶은 프로그램도 마땅히 없었고 티비를 안보면 방에서 음악을 들었을 것이다.


     바빠서 오랫동안 여름휴가를 가지 못했다. 그런데 스케치북을 보고 있으니 그날이 생각났다. 김정은의 초콜릿은 이미 종영한지 오래였지만 여름 밤 음악프로그램을 보는 것만으로 오래전 여름휴가가 떠오르게 되었다.

이젠 전처럼 바쁘지도 않다. 그래서 이번 여름엔 반드시 여행을 가려했다. 수많은 여행 계획이 있었지만 대부분 가지 못했다. 더위를 피해 더워도 좋은 곳으로 가야하는데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집만한 곳이 없었다. 여름휴가를 생각해보면 더워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뜨거운 모래사장을 지나 바다로 뛰어드는 것도 좋았고, 파라솔 아래 누워 땀 흘리며 낮잠 자는 것도 좋았다.


     올 여름은 너무나 뜨거웠기에 에어컨으로 서늘한 거실에서 스케치북을 보며 여름을 나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덕분에 오래 전 여름이 생각났다. 여유 있는 여름을 난게 몇 년 만인지. 5년도 더 된 것 같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잠깐이나마 바다도 보았고, 가족들과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야구도 봤다. 특별한 무언가는 없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휴가를 보냈다. 언제 다시 이런 여름을 보내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늦은 밤 스케치북을 보며 음악 정도는 들을 수 있는 여름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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